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훈요 10조 (문단 편집) === 서경(평양) 중시(제5조) === 제5조를 보면, 고려의 초기 왕들은 서경을 개경에 이은 제2수도처럼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. 고려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나라이니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서경(오늘날의 [[평양]]) 역시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 못지 않게 여겨야 한다는 뜻이다. 왕건은 고려 왕조가 성립된 뒤 서경을 애지중지하며 화려하게 재건하는데 큰 공을 들였다. 왕건은 서경을 통하여 고구려의 뒤를 이었다는 정통성을 내세우는 동시에 서경을 북벌의 전진 기지로 삼으려고 했다는 것이 통설이다.[* 지리적으로도 서경은 고려가 요동을 차지했을 시 한반도 내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요동을 근거리에서 컨트롤할 수 있는 좋은 입지를 갖추고 있었다. 또한 개경은 입지가 좋지 않아 쭉 천도론이 제기되었기에 요동 점령, 즉 국방문제만 해결되면 바로 서경으로 천도할 만한 상황이었다. 하지만 연이은 강대국들의 요동 점거라는 냉혹한 현실 때문에 결국 북진정책은 실패했고 결국 조선조에 들어서면서는 오히려 남경으로 후퇴하게 된다.] 이를 보면 거란 배격 정책과 마찬가지로 서경 중시 정책은 '''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는 북진정책'''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. 실제로 온갖 국가 중요 시설들이 서경에 건설되었고, 분사제도를 통해 서경에 개경의 정치체제와 유사한 독자적 정치체제가 구축되기도 하였다. [[정종(고려 3대)|정종]]은 서경 천도를 하고자 시도했지만 무리한 계획이였고, 당시 백성들 및 신하들의 반발로 인해 실패했다. 이렇게 서경의 위세가 수도인 개경 만큼이나 높아지다보니 개경파와 서경파로 국론이 분열되는 부작용도 생겼다. 결국 [[묘청]]의 난과 [[조위총의 난]]을 거치면서 서경의 분사제도는 폐지되었다. 서경의 길함을 설명하면서 수덕을 언급한 것은 [[오행#s-4|오덕종시설]]에 기반한 것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